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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차 아태공포럼 발표내용 (김제원)

주제: 中國古典의 현대적 효용성

54차 아태공포럼 발표내용

 

주제: 中國古典의 현대적 효용성

          - 中國古代 夏殷周 春秋戰國時代政治제도와 그 文化 -

강사: 김제원 서울시 공무원

일시: 2016.10.26.() 오후5

 

 

1. 中國古代3대 문화

고고학적으로 현재 중국인의 조상인 원중국인이 황화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수혈식의 움집을 짓고 씨족사회를 형성하여 원시농경과 가축 사육을 영위하면서 토기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화사의 흐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이 때에 하()()()의 이른바 중국 고대 3대의 문화가 창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승(傳承)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는 어로와 수렵을 시작했다는 太昊 복희씨와 농사기술과 경작법을 창조한 炎帝 神農氏 및 백성들에게 火食하는 법을 가르치고 漢族의 부락을 통일 최초의 국가를 건설한 黃帝 燧仁氏 三皇五帝(少昊, 顓頊, 帝嚳, , )로 시작된다. 그들 중 황제의 처는 잠업(蠶業)을 발전시켜 비단을 만들었으며, ()는 그의 후계를 자신의 아들 대신 덕이 있는 순()에게 넘김으로써 덕치(德治)의 이상을 설정하였고, 순은 효()의 법도를 몸소 실천하여 후세의 삶의 귀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전설을 근거한 것으로 우주의 창생과 제반에 걸친 인간 삶의 시초에 대한 원시 고대인들의 철학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요와 순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의 정치와 도덕 등 정신적 이상을 설정한 것이다.

 

1) ()()() 왕조

(1) 의 변천과 덕치

비록 전설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중국의 통치체제가 시작된 것은 순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우왕(禹王)이 세습왕권으로서의 하왕조(B.C. 2205~1766)를 개창한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우왕은 순에게 등용되어 황화의 대홍수를 다스리는 치수사업에 성공한 공덕으로 순으로부터 왕위를 선양(禪讓)받고, 그 뒤 순이 죽자 각 지역의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하후(夏后)라는 명칭을 쓰며 천자(天子)의 위()에 올랐다. 이는 중국이 이집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수사업(治水事業)이라고 하는 대역사(大役事)를 통해서 중앙집권적인 통치 권력이 형성되었고, 아울러 문화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왕(禹王)은 그 뒤 그의 재상이던 익()에게 선양(禪讓)하려고 하였으나 천하가 우()의 덕()을 흠모하여 그의 아들 계()를 임금으로 받들어 왕위가 상속됨으로써 선양제(禪讓制)가 종식되고 왕위세습제(王位世襲制)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왕조(夏王朝)의 마지막 왕인 걸()은 실덕(失德)하여 은()나라의 성탕(成湯)에 의하여 축출된다.

설화에 따르면, 성탕은 걸왕(傑王)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은왕조(殷王朝;B.C. 1766~1027)를 개창하였다. 그는 왕위에 올랐으나 마침 찾아온 7년간의 걸친 큰가뭄(七年大旱)으로 백성들이 큰 곤욕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어 마침내 비를 오게 하였다. 그는 이 같은 성덕(聖德)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고 백성들을 잘살게 하였다. 그러나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여인에게 현혹되어 백성을 외면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서 향락생활을 했고, 이를 간()하는 신하들을 포락지형(炮絡之刑)으로 다스리는 폭정을 가하였다. 이로 해서 민심은 이반되어 백성들은 은나라를 떠나, 당시 문왕(文王)이 다스리고 있던 이웃의 주()나라로 몰려들게 되어 은나라는 쇠()하고 주()나라는 흥()하게 되었다. 드디어 주나라 문왕의 신하들은 은나라를 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것을 청하였으나 천명(天命)을 소중하게 생각한 문왕은 이를 거절하고 신하의 예()를 계속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달랐다. 그는 강태공(姜太公)등 현신(賢臣)을 거느리고 은나라를 치고 스스로 천자(天子)의 위()에 올라, 그것을 혁명 즉 천명(天命)을 바꿈이라 하였다. 모름지기 천자의 위는 덕을 지니고 있어 민심을 얻고, 그로써 백성을 잘 다스려 그들로 하여금 잘먹고 잘입고 잘살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실덕(失德)하여 이를 행하지 못하는 천자는 마땅히 제거되고 덕이 있는 자가 그 위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비록 전설이나 설화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우선 중국의 천자는 제후(諸侯)들로부터 그의 덕을 인정받음으로써 즉위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덕이라 함은 민심을 얻어 그들의 노동력을 동원, 치수사업을 성공리에 마쳐 농경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지도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민심은 천심(天心)이며 덕은 천심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의 특징인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전통이 여기서 비롯된다.

 

(2) 은허와 은나라의 생활

성탕(成湯)왕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던 은왕조(殷王朝)는 하남성(河南省) 안양시 소둔(小屯)의 은허(殷墟)가 발굴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가 확인되었다.

여기서 발굴된 갑골문자(甲骨文字)는 거북의 갑옷(龜甲)이나 동물의 뼈(獸骨)에 새긴 상형문자(象形文字; 卜辭라고도 한다)로 점을 치는데 이용된 문자라는 뜻이다. 주로 제사(祭祀군사· 천문(天文) 및 흉풍(凶豊길흉(吉凶)에 대한 점이 쳐진 것으로 보인다. 1899년의 왕의영(王懿榮)이 연구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어 나진옥(羅陣玉왕국유(王國裕동작빈(董作賓) 등에 의하여 그 연구가 이루어져, 한자의 근원이 거기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은허에서는 청동으로 된 무기나 제기(祭器옥기(玉器도기· 골기(骨器) 등이 발견되었고 무려 1,000여명의 순장자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어 이 시대에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강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전승자료(傳承資料)와 더불어 이 은허의 유적 발굴 등을 통한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은나라는 정치적으로 제정일치의 신정정치(神政政治)였고, 사회적으로 왕족을 중심한 지배계급과 평민· 노예 등으로 구성된 피지배계급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왕위계승은 형제상속제에서 부자상속제로 변천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피정복부족을 노예로 활용한 농업· 목축· 수공업 등이 행하여졌으며 패화(貝貨, 子安貝)를 사용하는 화폐제도가 있었다. 이를 통하여 이 당시 원격지(遠隔地) 무역이 시작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2) 왕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은나라의 끝왕인 주왕(紂王)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여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혁명을 일으켜 은나라를 멸하고 위수분지(渭水盆地)의 호경(鎬京)을 도읍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주나라(B.C. 1027~770)는 중원 땅을 확보한 뒤에는 하남성 낙양(洛陽)에 낙읍(落邑)이라는 신도읍으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하· 은나라와는 달리 비교적 실재성에 있어 신빙할 만한 왕조다. 이 시대에는 그 후 중국인들이 이상으로 삼는 정치가 행하여졌다. 그 골자를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1) 주공의 선정

첫째, 주공(周公)의 선정(善政)이다. 무왕은 아우인 주공으로 하여금 정무(政務)를 통괄케 하였는데, 주공은 무왕의 사후(死後) 그의 조카인 성왕(成王)의 치세까지 선정을 베풀었다. 주대의 통치이념은 은대의 천명설(天命說)을 수정하여, 무왕의 혁명을 합리화 하는 유덕수명설(有德受命說)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즉 은대에는 천자의 권한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도전할 수 없으며, 누구나 그것에 절대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주나라의 유덕수명설은 천자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저절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있는 자만이 그것을 받아 활용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약 기존의 천자가 실덕(失德)을 할 경우에는 그 권력은 마땅히 반환되어야 하며 덕이 있는 이가 이를 받아 새롭게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서양에 있어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부정하고 자연법사상에 입각한 주권재민론(主權在民論)을 근거로 한 존 로크(John Locke)의 혁명론과 매우 가까운 주장이라 할 것이다.

 

(2) 봉건제도

둘째, 봉건제도(封建制度). 주나라는 무왕이 은으로부터 정권을 전취(戰取)하고 주공에 의해서 제국으로 정비되어 북중국의 대부분인 중원지역(中原地域)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B.C. 8세기에 이르러서는 주나라가 취한 나라는 주변 국가들을 합하여 200여 개가 되었다. 주나라는 이들을 통치함에 있어서 이른바 봉건제도를 활용하였다.

이 제도는 주공에 의해서 시행된 지방행정제도로 천자는 도읍(都邑)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京畿)지역, 즉 섬서지방만을 직할지로 다스리고 그 외의 전국 지방은 황실(皇室)의 일족이나 개국공신(開國功臣)등을 제후(諸侯)로 봉()하여 세습적으로 통치하며 왕실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유사시 군대를 출동하도록 하는 제도다. 주왕실(周王室)의 일족(一族)들과 각 제후(諸侯)들은 그들의 신분등급에 따라서 공((((()의 작위(爵位)를 가지고 각나라에 임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는데, 거기서 그들은 그 휘하에 경(대부(大夫() 등으로 구분되는 가신(家臣)들을 거느려 그들에게 봉토(封土) 또는 채읍(采邑)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봉사토록 하는 제도다.

봉건제도라는 말은 서양 중세사회의 사회· 경제체제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사회구조는 유사하나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이고 정신적 세계에 대한 지배권이 로마교황이라고 하는 별도의 정상(頂上)에게 있기 때문에 봉건제도는 오로지 세속적 세계에서 영주와 기사, 기사와 농민이 봉토라고 하는 토지와 그에 대한 조건부의 충성만을 약속하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곧 천()을 대신하는 존재, 즉 천의 대명자(代命者)로서 천하(天下) 모든 토지의 주인이며, 동시에 정신세계의 수장이다. 그러므로 주대(周代)의 봉건제도에서는 봉건제후들이 상전(上典)에게 바치는 충성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동시에 토지의 소유관계 또한 세습적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것이 쌍방간의 계약관계가 종결되면, 그 해지(解止)와 더불어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데 비하여, 주대의 봉건제도는 그렇지가 않다고 하는 것이다.

 

(3) 종법제도

한마디로 주대의 봉건제도에서는 토지의 상속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속은 적자상속제도(嫡子相續制度)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왕위(王位)와 가통(家統)은 장자(長子)가 잇는다는 원칙인바,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적자(嫡子)를 제외한 형제의 이완현상(弛緩現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고안된 것이 종법제도(宗法制度)이다. 즉 장자는 부친으로부터 재산과 지위를 상속받는 대신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고 동족(同族)을 통제하고 상호부조를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주대에서는 이 제도를 규약으로 제정하여 국왕과 제후를 제외한 지배계층에 통용케 하였다. 이것은 봉건제도를 유지시키는 결속력이 되었다.

 

(4) 경제제도-정전법

봉건제도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수취제도(收取制度). 즉 토지를 봉토로 분양해 주고 거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를 거둬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공은 정전법(井田法)을 세웠다. 이는 토지를 우물 정()자로 구획하여 9등분하고 가운데 부분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변두리 부분을 사전(私田)으로 하여 농민은 공전을 공동으로 경작, 그 수확물을 수조권자(收租權者)에게 바치고 사전을 경작해서는 농민이 취하는 제도이다.

 

(5) 사회 및 사상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주나라가 이상과 같은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유지한 명분의 기초가 된 것은 천()에 대한 숭배사상이다. 원래 은대 이래로 천자(天子)는 천명(天命)을 받은 천의 대명자라고 생각하는 천명설(天命說)이 있었는데, 주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계승하면서도 무왕의 혁명을 합리화할 필요에서 유덕수명설(有德受命說)을 세워, 기성의 천자가 부덕할 경우, 그를 몰아내고 천명을 새롭게 하는 혁명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천자는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가 통치의 이념이 되었으며, 가족제도를 중시하여 효()를 근간으로 하는 예법(禮法)이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치자(治者) 계급에게 있어서는 육례(六禮; · · · · · )가 필수교양이었다.

이와 더불어 이 시대에 이미 중화사상(中華思想)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천자(天子)가 머물려 통치하는 황화 유역을 천하의 중심, 즉 중원(中原)으로 보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변방을 오랑캐의 나라로 보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중원을 둘러싼 4방의 오랑케를 동()의 이(), (西)의 융(), ()의 만(), ()의 적()이라 하였다.

 

2. 춘추전국시대

1) 춘추시대

(1) 중원의 정세 변화

이상과 같이 중원에서 주나라가 전성하고 있을 무렵 중국 전역에서는 점차적으로 주나라를 모방한 많은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역사가 진전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인간의 지혜와 사회가 발달하여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유일하게 일찍이 문명을 이루어 선진적인 국가로서 위력을 발휘하던 나라는 이와 같은 주변 여러 나라가 주와 동등한 수준의 문화를 이루고 권력을 형성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왕실의 권위는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들은 기회만 있으면 주나라를 대산해서 천하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2) 견융의 침입

이 때에 기회를 제공한 것이 B.C. 770년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도읍을 낙읍(洛邑; 지금의 낙양)으로 옮기는 이른바 주의 동천(東遷)이 있게 된 것이다. 견융이란 원래 중국서방에 위치한 오랑케 융민족(戎民族)을 호칭하는 것으로 이들 중, 특히 개를 토템으로 삼는 민족이라 해서 견융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들은 평소부터 주나라의 서쪽 변경을 자주 침략하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B.C. 771년 주나라 도읍지까지 침입하여 주나라 유왕(幽王)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주나라 왕실은 도읍을 낙읍(洛邑) 지금의 낙양(洛陽)으로 옮기는 동천(東遷)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존왕양이

이를 계기로 주나라는 서주(西周)시대와 동주(東周)시대로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 같은 주의 동천(東遷)은 주나라의 위신을 추락시킴과 함께 약체성을 천하에 폭로한 일이다. 실제로 이로부터 주나라 왕실은 어떠한 정치· 군사상의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B.C.221년 진시황제(秦始皇帝)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존경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다. 이 일이 있는 뒤 중국 전역(全域) 각 지역의 제후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내세워 자체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하는 한편 세력다툼을 시작하였다.

 

(4) 패자정치

여기서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 ()의 환공(桓公), ()의 문공(文公), ()의 장왕(莊王), ()의 양공(襄公), ()의 목공(穆公) 등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覇)이며 이로부터 이들에 의한 패자정치(覇者政治)가 시작되었다.

 

(5) 관포지교

그 중에서도 강태공(姜太公)의 봉국(封國)이었던 제()나라에서는 환공(桓公)이 포숙아(鮑叔牙)와 관중(管仲)과 같은 현신을 거느려 막강한 세력을 폈으며 이에 따라 포숙아와 관중은 중국의 전설적이고 국민적인 영웅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관중은 창고(倉庫) 안이 충실하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충분하면 영욕(榮辱)을 알며, 윗사람이 법도를 지키면 육친(六親)이 견고하나, 사유(四維; · · · )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한다.”는 정치적 인격을 앞세워 국가를 이상적으로 다스려 패권에 도전하였다.

이 패자정치는 B.C.403년 전국(戰國)시대가 펼쳐질 때까지 2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공자(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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